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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근 (2001-12-13 21:53:32, Hit : 7785, Vote :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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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날
잠시 그대의 집을 찾지 못했더니 그새 눈이 내리고 있었군요. 물구나무 선 이름은 마치 세상의 속내를 뒤집어보려는 집주인의 마음을 전하는듯하고요.  
화면 속의 눈을 내가 맞으며 문득 대학 시절의 한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대학 2학년 때던가, 여느 때처럼  학교 앞 송천식당(이 식당의 이름을 꼭 밝혀야 합니다.)에서 외상으로 막걸리 한 병씩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는데, 눈이, 그냥 내리는 게 아니라, 마구 퍼붓고 있었습니다. 함박눈이란 바로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커다란 눈송이, 안경 쓴 친구의 안경 전체를 덮어버리는, 그런 눈발이었습니다. 한껏 눈내리는 밤의 분위기에 취한 우리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어두운 골목길의 포장마차에 들어갔지요. 그러나 포장이 씌워져 있지 않은 그 포장마차엔 술이 없었습니다. 온갖  안주들만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요. 하얀 종이 위에 매직 글씨로 갈겨쓴 안주의 메뉴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 평화, 자유, 사랑, 희망, 고독, 예술 ------  

방울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젊은 주인은 모자의 깊이만큼 깊은 표정의 눈으로 물었습니다.  

뭘드릴까요?  

그때 우리가 안주로 무엇을 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안주의 값으로 소주  두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슈퍼에서 사다가 지불하고  그 사람과 나누어 마셨습니다. 그는 같은 대학의 화공학과 3학년이었는데, 그가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그와 나눈 대화의 자세한 내용도 기억이 나지않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어떤 감동에 취해 있었고 그 순간은 내 젊음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짙게 남아 있습니다.  

몇시간 동안 엉터리 포장마차 주인이었던 그 친구도 이제 불혹의 나이를 미혹과 혼란 속에서 살고 있겠지요?  
- 知友가 보낸 옛글을 꺼내어 읽으면서 눈을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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