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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2017-07-02 15:15:27, Hit : 184, Vote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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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 - 시몬드 보부아르 글
결론

노년은 인간의 삶의 필요불가결한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우리의 우연의 필연성”이라고 부른 것도 아니다.
하루살이처럼 많은 동물들은
쇠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번식 후에 죽는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 조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쇠퇴한다.
그것이 경험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과정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쇠는 개인의 활동의 축소를 가져온다.
흔히 정신적 능력의 감퇴 세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의 변화를 수반한다.
때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서
말년에 가치가 부여되기도 했다.
어떤 개인들의 ― 예를 들어
고대 중국의 여자들 ― 노년은
성인 시절의 가혹한 삶의 조건에 대한
피난처가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종의
생명의 페시미즘으로 노년에 만족한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불행의 근원으로
여겨진다면,
차라리 그것보다 반쯤 죽은 상태를
선호하는 것은 논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마침내 영원은 그를 마치 그 품에서
바꾸어놓는다.”
죽음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며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빅토르 위고는 동시에
그리고 영원히 30세이며 80세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80세였을 당시에는
그가 사는 현재가 과거를 마멸시키고 있었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우위는
―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렇지만 ―
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의 쇠퇴나
혹은 과거의 부인인 경우 특히 슬픈 것이다.
옛 사건들, 예전에 획득한 지식들은
생명의 불이 꺼진 삶 속에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것들은 존재했던 것이다.
기억이 쇠퇴하면 그것들은
하찮은 어둠 속으로 침몰해버린다.
삶은 마치 닳고 닳은 스웨터처럼
한 고리 한 고리씩 풀려나가
노인의 손에 남는 것은
오로지 형태 없는
털실 오라기 몇 가닥밖에 없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를 침범한 무관심이
그가 과거에 가졌던 열정,
확신들, 활동들에 이론을 제거하고,
그것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늙은 샤를뤼스는 단 한 번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함으로써 과거 그의 존재 이유였던
귀족적 자존심을 망가뜨린다.
또 아리나 페트로브나가
노후에 미워하던 아들과
화해한 것도 그러하다.
루소의 말대로
모든 것이 헛된 수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이미 얻은 결과들에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게 되면,
과거에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경멸감은 가슴 아픈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일생을 말년까지 쫓아가보면,
우리는 그와 더불어 그 모든 노력의 헛됨을
슬프게 느끼게 된다.
이런 낙담의 순간들이
그가 죽은 후,
그의 작품의 위대성을 해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모든 노인들이 사직자들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노인들은 오히려 고집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그들은 흔히
자기 자신의 풍자화가 되고 만다.
그들의 의지는 일종의 이성이 없는,
혹은 심지어 모든 이성에 거역하는
관성의 힘을 고집한다.
그들은 어떤 목표를 위해서
원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과거에 원했기 때문에
지금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인들에게서는 습관과
기계적인 행동들, 경직화가 창조를 대신한다.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의 이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제거할 능력이 없는
고통이나 질병, 노년과 같은 약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우리 자신을 축소시키는
이런 상태 자체를 용감하게 견디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윤리는 주장한다.
다른 계획이 없기에
나이든 사람은 이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계획이란 단지 우리의 활동에만 관계될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지 않는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숙명일 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 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 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활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고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
다만 이런 가능성은 오로지
한 줌의 특혜자들에게만 주어진다.
특혜를 부여받은 자들과
그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가장 깊고 고랑이 파이게 되는 때는
바로 말년이다.
이러한 두 부류를 비교해봄으로써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제기한 개인의 쇠락에 있어서
불가항력의 것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쇠가 시작되는 나이는 언제나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오늘날, 광부는 50세에 끝난 인간이지만,
특혜자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80세에도 경쾌하게 지낸다.
노동자들의 사양길은 일찍 시작되고,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
‘생존’기간 동안에도 손상된
그의 몸은 질병과 불구에 시달리게 된다.
다행히도 자기 건강에 유의해온 노인은
죽을 때까지 거의 그대로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착취당한 자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건강과 명석한 이성을 보존한다 해도,
은퇴한 자는 권태라는 끔찍한 재앙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당한 은퇴자는
다른 어떤 영향력도 회복할 수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여가란 자주성이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자는 시간을 죽일
소일거리조차 찾아내지 못한다.
음울한 나태는 결국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남아 있는
신체적·정신적 균형마저 해치게 된다.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자는 현재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더욱더 수치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는 그들의 말년의 몫인
절단된 비참한 조건을 미리부터 만들고 있다.
노쇠가 때 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면,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찍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볼 때,
노인들의 비탄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람들이 제안하는 모든 처방책들은
모두 가소로운 것들이다.
어떤 처방책도 사람들을
일생 동안 희생물로 만들어온
체계적인 파괴를 씻어줄 수는 없다.
그들을 치료해도 그들의 건강은
되돌려줄 수 없다.
온당한 양로원을 짓는다 해도,
그들에게 문화와 흥미,
그들의 삶에 의미를 줄 책임감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나는 현재 노인들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 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지배계층은
무산 계급을 대놓고
야만, 무지와 동일시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을 인류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가 생산력이 있을 때에만
인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늙으면,
사회는 마치 낯선 인간을 보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모적인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문화가 일단 얻은 후에는
곧 잊어버리는 무기력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면,
만약 인간이 문화를 통해
자기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그 영향력이 해를 지남에 따라 완성되며,
또 거듭나는 것이라면,
인간은 어느 연령에서나,
어떤 나이에나, 능동적이며
유용한 시민일 것이다.
만약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다른 수많은 미립자들 틈에 갇혀,
고립된 미립자처럼 무력화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본질적인 집단적인 삶에 참여한다면,
인간은 결코 유배를 겪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조건들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보다
조금은 더 거기에 가까이 가고 있지만,
아직도 한참 멀었다.
조금 전 내가 환기시킨
이상적인 사회에서라면,
노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꿈꾸어볼 수도 있다.
특권적인 어떤 경우에도,
나이로 인해 겉으로만 쇠약해진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속으로 약해진 사람의 경우,
언젠가는 병에 걸려 그 병을 이기기 못하고
죽는 일도 있다.
이 경우 그는 격심한 붕괴는 겪지 않는다.
말년이란 실제로
어떤 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을 터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말년이란
청년기, 장년기와는 다른 존재의 순간이나,
말년에는 그 나름대로의 균형이 있어,
인간에게 폭넓은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정의를 내렸다.
실제로 말년이란 이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틀린 것이다.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생활에 접근하는 순간
느끼는 불안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제외되는 순간 느끼는
고뇌와 대칭되는 것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일상의 반복되는 삶이 문제들을 은폐한다.
젊은이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게 될
사회라는 기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보도블록을 던지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 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 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글 / 홍상희, 박혜영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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